삶이 힘들다면… 촉촉하고 통쾌한 동화를... 그림책 매니아 중에 처녀 총각들이 즐비하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뽀얗게 먼지 앉은 앨범을 들추며 눈으로나마 동심을 만끽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쳇바퀴 돌며 시들시들 메말라가는 일상에 진저리치는 어른들에게 좋은 그림책 한 권은 단시간에 효험을 보여주는 ‘보약’이기 때문이다.
벨기에 작가 안 에르보의 ‘길쭉하고 담백한’ 그림을 좋아하는 매니아들에게 파란 시간을 아세요? 는 또 하나의 기쁨이다. 연필과 수채물감의 만남을 에르보처럼 단정하고 세련되게 표현해내는 작가도 드물 터. 이야기의 발상도 독창적이다. 낮과 밤, 그 사이에 존재하는 어슴푸레한 시간. 땅거미 내려앉는 저녁 무렵의 시간을 ‘파란 시간’이라고 명명한 작가는 이를 의인화해 낮의 태양왕과 밤의 여왕 사이에서 방황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낮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아주 짧은 시간을 빼면 파란 시간이 숨어 있는 곳은 낡은 가로등 기둥 속.
그러던 어느 날 외돌토리 파란 시간에게 희망이 생긴다. 해뜨는 먼 곳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새벽공주가 있다는 사실을 마법의 새에게 전해들은 것! 사랑에 빠진―장대 신발에 한 손엔 늘 작은 책을 들고 다니는―꺼병이 파란 시간을 허겁지겁 쫓아다니다 보면 해질녘과 동트는 새벽녘이 왜 그렇게 푸르스름한지, 사랑이 왜 희망을 주는지 당신의 아이들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난 커다란 털북숭이 곰이다 는 어떤 이유로든 스트레스를 받아 속불이 이글대는 날 읽기에 딱 좋은 그림책이다. 책 속 주인공처럼 ‘수리수리 마수리, 난 커다란 털북숭이 곰이다!’ 하고 외쳐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커다란 털북숭이 곰이 된 아이는 제일 먼저 학교로 달려가 외친다.
“오늘은 더워서 쉬어야 해요. 오늘은 수업을 안해야 한다고요.” 곰이 무서운 교장선생님은 당장에 아이들을 교실에서 풀어준다. 아이들을 이끌고 시내로 나간 털북숭이 곰은 이번엔 교통경찰 아저씨에게 모자를 빌린다. 아이들이 도로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게 달리던 자동차들을 모두 세우기 위해서다. 그뿐인가. 멋진 자동차를 타고 신나게 드라이브를 하고, 좋아하는 여자친구에게 뽀뽀도 하고.
자신감을 얻기 위해 습관처럼 들고 다니는 빨간 의자 위에 올라서서 호통을 치는 털북숭이 곰의 모습이 귀엽다. 또 털북숭이 곰으로 변신한 꼬마 앞에 무릎 꿇은 어른들이 제발 자동차가 달릴 수 있게 해달라고 비는 장면은 사사건건 아이들을 힘으로 제압하려 드는 기성세대에게 통쾌한 일격을 날린다.
(김윤덕기자 sion@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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