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 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 조병화의 시 <초상> 전문
사랑의 진행 과정이 소박하게 그려진 시입니다. 다섯째 줄까지는 누구나 말할 수 있는 평이한 진술이지만 '호사스런 고독'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렇게 고독이 호사스럽게 느껴질 때가 아마 사랑의 절정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 시의 절정은 마지막 줄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없는 바다 기슭은 절대 고독의 공간이면서 나아가 새로운 생이 시작되는 열린 공간이기도 합니다. 화자가 미친 듯이 달음질치는 것은 사랑의 괴로움을 잊어버리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 앞에 또 다른 사랑이 펼쳐질 것은 뻔한 일. 바다 기슭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이 실제로 눈에 보이듯 생생합니다. 이 여름, 당신은 바다 기슭에서 무엇 때문에 달음질을 치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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