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방과후에는 테니스 코트에서 살았다. 사윌 줄 모르는 정열은 달빛을 받아가면서도 공을 쳤다. 별빛이 내리는 코트에서 네트를 걷으면 모롱이를 돌아가던 기적.
품에는 연문(戀文)이 들어 있었다. 경성에서 보내오는 보랏빛 편전지(便箋紙). 다께히사 유메지의 그림을 닮은 젖은 속눈썹의 소녀.
회중 전등을 감추고 밤마다 찾아오는 소녀도 있었다. 저만치 강바람에 타원형을 그리던 주름치마 자락.
나는 마치 목석이었다. 끝내 사랑일 수도 없었던 첫사랑의 추억.
- 박용래 산문집 <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 중에서
한국적 정서라고 일컬을 만한 것 중에 가장 절실한 한 군데를 꼭 집어내 시를 쓴 시인, 박용래(1925~1980) 시인의 산문집을 뒤적이다가 보면 산문도 시처럼 읽힐 때가 많습니다. 정갈하고 구체적이면서 간결한 언어, 유독 마음 여린 시인의 성정이 페이지마다 묻어 있어서이겠지요.
시인은 학창 시절에 테니스를 유난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테니스 코트에서 팔뚝의 힘을 기르며 땀만 흘린 게 아닙니다. 멀리서 온 연애 편지를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가슴은 테니스 공처럼 뛰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기다리는 다른 소녀 때문에 울렁거렸을 게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태연한 척 '목석'이었다고 잡아뗍니다. 과연,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목석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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