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연장에 가는' 이유
(저자: 김수현 sbs 기자)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지난번 글 쓴 날짜가 가물가물할 정도입니다. '너무 바빴다'고 말씀드리면 이해해 주실까요? 요즘 제 일과가 더욱 빡빡해졌습니다. 정치권에 참 많은 일들이 있었거든요. 공연을 몇 편 보긴 했지만, 차분히 앉아서 생각을 정리할 여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글쓰기가 어려워지더군요. 그래서 오늘은 뭘 쓸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한가지에 몰두하기
요즘은 진득하게 앉아서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실감합니다. 책 한 권 온전하게 읽은 게 없습니다. 해리 포터 새 시리즈 '불사조 기사단'을 빨리 읽겠다는 생각에 번역판이 나오기 전에 영문판을 예약 주문하는 '만용'을 부렸습니다. 800여 페이지나 되는 책이 빨리 읽힐 리가 없습니다. 몇 페이지 읽다 잠들고, 또 몇 페이지 읽다 밀쳐두고, 이러다 보니, 앞부분이 생각이 안 나 다시 돌아가고, 들춰보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결국 진도를 절반도 못 나간 채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dvd 타이틀도 안 보고 쌓아놓은 게 수십 장입니다. 벼르고 벼르다 밥 포시(뮤지컬 안무가이자 연출가. 얼마 전 제가 소개해 드린 '시카고'도 그가 연출한 작품이었죠)가 감독한 영화 '올 댓 재즈'를 보려고 틀었는데, 이것도 사흘에 걸쳐서 겨우 다 볼 수 있었습니다. 두 시간 정도 앉아서 영화 보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요. 언제 시간이 간 줄 모를 정도로 '기분 좋은' 집중의 상태를 맛보는 게 얼마나 힘든지요.
베토벤 협주곡 전곡 완주
몇 주 전 일요일, 저는 아주 오랜만에 클래식 콘서트를 관람했습니다.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회'였습니다. 베토벤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5곡을 하루 저녁에 모두 연주하는 것입니다. 유라시안 필하모닉과 협연했습니다. 지휘자가 따로 없이 피아니스트가 지휘까지 겸했습니다. 두 차례의 휴식 시간까지 합치면 거의 4시간 가까이 걸린 연주회였습니다.
베레조프스키는 이미 두 차례 내한공연에서 엄청난 힘과 테크닉을 보여줬다는 '소문'을 자자하게 들었던 터라, 한 번 보고 싶었던 공연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또 뭐 하러 '고행'을 자처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잠깐의 휴식이 아쉬운 때, 집에서 오랜만에 뒹굴뒹굴하며 음반이나 듣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는 그 날 예술의 전당에 가 있었습니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3번, 휴식시간. 2번과 4번, 다시 휴식 시간. 그리고 '황제'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협주곡 5번을 연주하는 피날레. 저는 사실 공연 초반부에는 완벽하게 '집중'하지는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중간 중간 지루하고 졸린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음악회가 진행되면서 저는 점점 베레조프스키의 연주에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듣던 대로 베레조프스키의 힘과 테크닉은 대단했습니다. 아주 쉽고 가뿐하게 연주했습니다.너무 가뿐해서 도리어 아쉬움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는 오케스트라를 바라보면서 연주하고 지휘까지 했기 때문에, 관객은 돌아앉은 그의 뒷모습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넓은 등은 많이 흔들리지 않았고, 마치 우뚝 솟은 바위이거나 산인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베레조프스키의 연주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갔습니다. 두 번째 휴식 시간을 마치고 마지막 곡 '황제'를 연주할 때, 저의 긴장과 기대감도 최고조에 달해 있었습니다. 어느덧 저도 베레조프스키의 장정에 동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황제'에서는 영원히 지칠 것 같지 않았던 그도 힘들었던지, 몇 차례 미스 터치가 귀에 걸리긴 했지만, 웅장한 음악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가 마지막 음을 내려치자,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박수소리! 장장 네 시간의 대장정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저는 거대한 드라마의 '완결'을 본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공연장에 왜 가는가
이 날 저는 제가 공연을 보는 이유를 새삼 발견했습니다. 야근한 다음날이나 황금 같은 휴일, 피로에 절어있는 상태에서도 왜 기를 쓰고 공연장을 찾아다녔는지 깨달았습니다. 공연을 보는 이유는 당연한 얘기지만, 제가 음악을, 연극을, 뮤지컬을, 무용을 좋아해서입니다. 제가 '공연장에 가는 이유'는 '기분 좋은 집중 상태'를 맛보고 싶어서입니다. 저를 한 눈 팔게 하고, 신경 쓰게 하는 주변의 사람과 사물들에서 벗어나, 무대에 집중하고 싶어서입니다.
제가 무대에 집중할 때 공연장은 일상의 공간을 벗어납니다. 저는 관객석에 앉아서 무대에 있는 예술가와 은밀한 '소통'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즐깁니다. 또 공연을 보면서 오랜 시간 진득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저의 인내심을 다시 확인하고 성취감과 위안을 느끼기도 합니다. 공연 보는 즐거움은 '인내의 결실'이기도 합니다. (물론 아주 형편없는 공연을 보면서 참는 것이 즐거움이란 얘기는 아닙니다.)
지난 일요일에는 연극을 한 편 봤습니다. 정치부로 옮기고 나서 뮤지컬이 아닌 연극을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제일화재 세실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프루프(proof. 증명)'라는 작품입니다. 미국의 극작가 데이빗 어번이 썼고 2001년 토니상 최우수 연극상과 여우주연상, 연출상을 받았습니다. 데이빗 어번은 같은 해 퓰리처상 드라마 부분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를 연상하게 하는 작품으로, 천재 수학자의 딸이 주인공입니다. 수학이 중요한 모티브가 되지만, 결국은 새로운 수학원리 증명보다 중요한, 인간의 '관계'를 역설합니다.
이 연극은 노래와 춤이 있고, 화려한 무대를 자랑하는 뮤지컬에 비교한다면, 너무나 정적이고 따분할지 모릅니다. 공연 내내, 수학자와 그 딸이 사는 낡은 집을 재현한 무대장치는 바뀌지 않습니다. 등장인물은 4명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연극 보는 즐거움을 안겨준 작품이었습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적절하게 복선을 배치하면서 탄탄하게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원작의 힘이 가장 컸고, 김광보 씨의 연출이나 추상미, 전성환, 추귀정, 장현성씨 등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수학자 아버지의 천재성과 광기를 함께 물려받은 딸 역의 추상미 씨가 열연하는 것을 보면서, 지금은 전설이 돼 버린 '배우 추송웅'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공연 보기의 즐거움은 휴식의 유혹을 마다하고, 2시간이 넘는 공연 시간 동안 깜깜한 극장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던 제 '인내'의 대가였습니다. 공연 보기는 일종의 '의식'입니다. 그리고 이 의식에서는 때로는 인내 자체가 즐거움이 되기도 합니다. 궤변 같지만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저는 다음 휴일에도 '피곤해 죽겠어'를 되뇌면서 공연장에 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게 더 즐거우니까요.
p.s. 이 글 역시 쓰는 데 사흘이나 걸렸습니다. 오랜만에 쓰니 더 어렵네요. 다시 한번, 너무 뜸했던 것, 죄송합니다.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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